거창하게 말 하는 것 보다는 약물 폐해의 심각성을 알리려 한다. 약물로 병원과 교도소에서 많은 시간을 허망하게 보낸 것을 후회한다. 나에게 10대 중반부터 10여년은 큰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는 아직도 약물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할 이야기가 많지만 단약을 하기 위해서는 혼자 해서는 안 되고 함께 싸워야 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단약의 초석이라 믿고 있다. 지난 세월 약물로 인한 고통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먼저 말 하고 싶은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억력에 문제가 많아 두서없이 그리고 년도와 시간을 쓰지 못함을 이해하기 바란다. 중학교 2학년 때 약물을 하던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 친구들을 통해서 약물을 알게 됐고 호기심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 약물이 잘 맞았다. 나를 기분 좋게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았다.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하였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친구들과도 친하지 못했다. 결국 1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고는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코팅기술을 배우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코팅을 하기 위해서는 본드를 바르는데, 공장에 꽉 찬 본드 냄새가 싫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은 머리가 아프다고 일정 시간이 되면 밖에 나가 쉬곤 했지만 나의 코는 점점 본드 쪽으로 향하였다.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종종 사라지곤 했는데, 본드 통에 코를 박고 있거나 본드에 취한 모습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면서 결국 집에서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2년 정도의 직장생활은 끝나고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보통 3개월, 6개월 혹은 1년 정도 등 총 4년 정도의 정신병원 입원 생활을 했다. 병원과 집을 오가면서도 약물을 끊지 못했다. 병원은 나의 집이 되었고, 점점 가족, 친구, 사랑하는 이도 떠나갔다. 그래도 계속 약물을 했다. 아니 본드, 신나, 가스에 이어 병원에서 알게 된 약(러미라)까지 하게 되었다. 병원생활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어서 큰 도움을 받은 기억은 별로다. 단지 독한 약을 먹었다는 기억뿐이고 배운 것이라고는 홀로 시간 보내기이다. 나는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냈다. 병원에서도 약물을 하고 살았다. 더하고 싶은 마음에 병원을 탈출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병원을 탈출하기 위해 숨은 곳이 죽은 자를 보관하는 안치소였다. 여러 개의 칸 냉장고를 보면서도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약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섭다고 전혀 느끼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약물을 하다 잡혀도 경찰에서 반성문을 쓰고는 훈방되곤 했으나, 1995년부터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이 강화되어서 그런지, 1996년 1월 집행유예처분을 시작으로 교도소와 치료감호소 생활 등 7번의 법적 처벌을 받았다. 그렇게 20대와 30대 초반을 보냈다. 교도소에서 다짐했던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맹세도 출소하자마자 해방감에 휩싸여 흔적 없이 사라지고, 다시 구속되어 있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머리는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도 몸은 가스를 사가지고 여관에 가 있었다. 한 번은 출소하고는 여관에 2-3일 틀어 박혀 내가 했던 부탄가스통이 큰 자루로 2자루가 될 정도였다. 잠 한번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그 짓만 하다, 여관 주인의 신고로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는 아마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약물을 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집에서 돈을 훔치고, 동냥도 하고, 잘못된 짓도 하고 해서 돈을 만지게 되면 약물을 구해 여관이나 으슥한 곳에서 혼자 했다. 이렇게 약물에 미쳤었다. 한번은 약물을 하다가 폭발하여 손과 얼굴에 3도 화상을 입었는데, 지금도 흉터가 심하게 남아있음, 그런 상태에서도 약물을 했다.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던지... 이런 후유증 때문인지,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의 기억이 없다.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기억도 없다. 단지 충격적인 기억만 있을 뿐이다. 약물을 함으로써 심하지는 않지만 종종 손과 발에 신경성 마비가 오기도 한다. 교도소에서도 마비가 와 병동에서 생활하기도 했었다. 나는 교도소를 출소하고는 교도소에서 만났던 사람을 통해 약물경험자들이 함께 하는 교회에 갔다가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도 NA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달 동안 단약할 수 있을까? 내 스스로도 의심하였다. 그러던 것이 만3년이 넘었다. 아마도 마약퇴치운동본부를 몰랐다면 지금도 교도소를 전전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약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난다. 약물 생각이 나면 무조건 마약퇴치운동본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NA모임에도 참석하여 힘을 받고 중독 회복자들이 주축이 된 교회에도 참석한다. 나는 단약을 하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함께 해야 하고, 믿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약을 하던 초창기에는 부모도 믿지 않았다. 마약퇴치운동본부 및 NA모임에 참석해서는 곁에 있는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부모님을 통화시켜 내가 약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약퇴치운동본부에 와서 단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차츰 부모님들도 나의 노력과 모습을 인정하게 되었고, 믿어주기 시작했다. 단약을 유지하니 내 자신에 대해 떳떳해질 수 있었다. 전에는 무조건 숨거나 위축되었는데 자신 있게 의견을 표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도 생겼다. 지금은 마약퇴치운동본부에 간다고 하면 물질적인 지원도 해주신다. 얼마 후면, 조그마한 가게도 내주시겠다고 한다. 나는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를 처음 알 때부터 사회에서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송천재활센터에 입소하지는 않았다. 아침 일찍 와서 함께 교육을 받고 청소도 하고는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계속 했다. 나는 사회에서 부닥치면서 단약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약을 결심한 초창기에 마약퇴치운동본부를 오가며 가게 및 철물점을 지날 때면 내 몸이 무의식적으로 그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래도 참았다. 이렇게 참고, 단약 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가게 및 철물점 앞을 지나다녀도 무덤덤해졌다. 이렇게 약물을 하면 뼈아픈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20년이 걸렸다 나는 미래를 생각지 안하고 약물에 너무도 무력했으며 또한 사회에서도 약물에 무력했다 그러나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의 도움으로 현재 약4년 동안 단약을 하며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믿음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도하며 회복을 향하며 하루하루 자신과 싸워가며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많은 시간을 싸워야 하기에 더 많이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노력이 아니기에 진정한 마음으로 다시금 반성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달리려 한다. 나 자신과 나와의 싸움 거울을 보며 다시금 나 자신을 무력 하지는 안는지 생각하며 회복에 찾아가는 사람을 찾아 나 자신을 이길 방법을 함께 노력하고자 한다. 지금도 매주 NA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고 경험자들이 주축이 된 교회에도 나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형을 받은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1996년 1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위반죄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상태에서 다시 약물을 하여 같은 해 6월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처음 시작하였다. 수형생활하면서 처음에는 약물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출소시점이 다가오면 올수록 더 긴장되었지만, 출소하여 사회생활하다 보면 다시 약물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1997년10월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1998년 8월 1년 4월이 징역형 및 치료감호를 선고받았고, 2000년 7월 1년 징역 및 치료감호를 선고받았고, 2001년 10월 징역 1년 6월 및 치료감호를 선고받았고 2003년 12월 치료감호 집행을 가 종료하였고, 2004년 2월 위형의 집행을 종료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