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하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하얀 백지 위에 무언가를 써내려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끗한 종이처럼 내 마음도 그리되어 새로운 삶들을 기록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삶에 무력했으며 약물에 중독된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라디오에서 ‘케세라’라는 노래가 나온다. 지금은 저녁 6시 37분, 저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아마도 맹인가수인 ‘호세 펠리치아노’일 것이다. 내 귀는 내가 고정시켜 놓은 93.9메가헤르츠의 CBS방송국의 저녁스케치라는 프로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지만, 내 손은 이 글을 쓴다. 내가 의미를 두면 세상은 모두가 기적의 연속이다. 노래가 바뀌었다. 예전에 많이 들어 귀에 익숙한 노래지만 가수와 노래제목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그냥 두고 싶다. 무엇도 탓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과거를 뒤로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아니 과거가 있기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내겐 깨트려 잠재울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부수고 깨트릴수록 그것의 편린들은 또 다른 기억이 되어 내 가슴을 할퀴고 들었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지금은 이미 버렸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부르투스의 칼을 가슴에 품었던 적이 있다. 카이사르를 살해한 그 칼이다. “오! 미덕이여. 너는 한갓 명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현재까지의 이력이 있다. 그런 이력들은 애초에 우리가 선택한 이력은 아니었지만 살아가면서 생기는 이력들은 거의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 된 것을 모두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이력은 내 뜻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들의 충격적인 고백 세상에 온갖 죄를 일삼으면서도 슬픈 영화를 보면 울었다. 어느 날 셋째 동서가 맡아서 키우던 하나뿐인 아들을 숙소로 데려와 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약물의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합법적 약물인 알코올을 내 안에 쏟아 붓고 있었다. 아들은 그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아들은 내 침대에서 잠이 든 것 같았다. 나는 아들과 함께 보던 비디오를 끄고 옷 방으로 쓰는 작은 방으로 가서 대마초를 피웠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던, 그러므로 다른 여자를 만나서 잘 살길 빈다며 떠나버린 아내 사이에서 난 하나뿐인 아들이 쓸쓸이 누워 잠든 모습을 보며 울었다. 그러자 아들은 갑자기 벽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누우며 어깨를 들먹였다. 나는 그런 아들을 끌어안으며 내 처지를 보고 안타까워 우는 아들의 볼에 내 눈물을 섞었다.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지환아? 너도 아버지가 불쌍하지?” 그러자마자 아들은 아예 대성통곡을 하며 “아니야! 나는 내가 불쌍해서 우는 거야!”라며 그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엄청난 충격으로 내게 다가왔다. 절대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말라고 정관수술까지 하며 키운 아들이었는데..... 방탕과 입원 그리고 회복 노력 그 때부토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나 버는 만큼 쓰는 것도 헤펐다. 언제나 아들을 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점점 더 방탕해지는 나를 보고 선배도 후배도 친구마저도 등을 돌렸다. 이미 나는 약물의 포로가 된 것이다. 선배의 충고도 후배의 질타도 모두 내 폭력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이었고 그들은 이미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았던 것을 이젠 안다. 자연히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가 약물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나는 내가 필요한 약물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앞에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 어느 봄날, 나는 녹아내리는 듯한 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다. 그때 내 나이 마흔하나. 당시 나는 수배 중이였고 김○라는 가명을 썼다. 그로부터 300일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치료를 받았다. 그해 추석엔 원장의 배려로 아들과 함께 2박3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중학생이던 아들은 세례를 받고 안젤로라는 이름을 썼다. 나의 치료도 신과 관련된 영적인 프로그램의 실행이었다. 퇴원 후 나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히로뽕은 한 번도 다시 사용한 적이 없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많은 돈을 없애고 결국 경기도의 한 시골로 이사를 했다. 나는 그곳에서 서울까지 모임을 다녔고, 휘경동 보호관찰소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었다. 90년대 말 가을, 나는 NA모임을 시작했다. 종로 조계사 경내에 있는 ‘원심당’이라는 불당과 성신여대 앞에 있던 성북구 구민센터에서 무상으로 모임장소를 대여해 주었다. 나는 히로뽕이 필요 없었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그렇게 좋아하던 대마초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아들은 좋아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입을 맞출 정도로 그 녀석이 말한 것처럼 “이젠 사람 같은데!”가 지금도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나는 큰 형과도 화해했고, 누나와 조카딸도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핑크빛 무드에 빠졌다. NA모임엔 AA협심자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나는 큰형과 함께 한 가지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나는 점점 자신이 붙어갔다. 다시 세상에 내 머리를 꼿꼿이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 온통 나를 지배했다. 제기동에 있는 ○○타워 65평짜리 집에 어머니를 모실 수도 있었다. 나는 부산에서 내 청춘을 묻었기에 서울에는 후배들이 별반 없었지만 다시 만들어가고 있었고, 모임도 제법 짜임새가 생겨서 어떤 이들은 물어물어 모임을 찾아오기도 했었다. 운명, 좌절, 그리고 재발 및 입원의 악순환 그러나 운명은 이미 정해진 듯, 그때 어떤 여자가 모임에 오기 시작했다. 그녀와 사랑노름에 빠지면서 다시 약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마초를 피기 시작했고 술도 마셨다. 다시 대마초를 하는 나날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도 히로뽕을 하던 이들과 연락이 닿았다면 그것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마초와 알코올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나는 망가졌다. 그녀의 인생도 망가트리면서 나는 제기동 집으로 들어갔고, 곧바로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이미 나는 미친 사람이 된 후였다. 약을 구할 길이 사라진 나는 자연스럽게 알코올 중독으로 전이되었다. 그때부터 끝없는 재발이 시작되었다. 병원은 바륨을 맞고 링겔주사를 꽂는 곳으로 이용했고, 그런 입 퇴원이 손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때 가까스로 나는 마음을 추스렸고, 정신과 약에 의존하며 AA모임에 나가면서 다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때 또 한 차례의 운명이 나를 기다렸다. 큰 형이 나를 동해바닷가의 한 호텔로 데려가서, 그 당시 그 곳을 관리하던 죽은 형의 직계 선배이자 나의 선배인 ○○을 몰아내고 내가 직접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갔지만 나는 결코 그 선배를 몰아낼 수 없었다. 그 선배가 대마초를 구해서 대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의리로도 그를 내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술 대신 대마초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때쯤, 큰형이 구속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도 특수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정신병원에 있었던 것으로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모든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약물을 시작했다. 이제 술보다는 이것이 낫다는 핑계가 생겨서 선배들도 나에겐 대마초를 나눠주었다. 호텔은 이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고 나는 원래 본토인 서울의 ○○동에 나가 있기 시작했다. 거기서 대선배인 ○○이 형을 모시고 그가 하는 사업에 쓰이기 시작했다. ○○동 일대를 문화재보호 형식으로 보전하고 반대지역 쪽에 호텔 등을 짓는 사업이었다. 우리의 청사진은 컸다. 우리는 주차장 하나를 점검해 놓고 사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온갖 사람들만 불러놓고 아무런 실행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사업의 대부분은 대마초가 주는 망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만 그려진 것이고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대마초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우리의 태도에서 진실성을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주변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고, 설상가상으로 제기동 집이 압수되어 경매에 붙여졌고, 내가 몰던 차까지 팔아서 큰형에게 변호사를 붙였지만 피해자가 워낙 많아서 큰형은 징역 2년을 꼬박 살았다. 결국 대마초와 술로 얼마 못가 경기도 광주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두 달여 만에 병원비만 천 만원 가까이 까먹고보니 서둘러 퇴원을 해야만 했다. 누나와는 그때부터 금이 갔다. 퇴원해 보니 어머니만 혼자 시골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초겨울, 이미 늙어서 거동조차 불편하신 어머니의 쇠스랑같이 굳고 차가운, 검버섯이 펴 삭정이처럼 부서질 것 같은 손에 의지해 정신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그로부터 330일을 꼬박 그 병원에서 지내며 나는 신을 찾고 나에게 제대로 맞는 약을 처방받았다. 다시 맨 정신의 희망을 품고 퇴원해 동작구에 터를 잡고, 읽고 쓰고, 쓰고 읽고 했고 의정부에 있는 교회를 다니며 지냈다. 하루 세 끼니를 피자조각으로 때우며 <믿음>, <희망>, <사랑>이란 주제로 글만 써서, 그 당시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은 나를 작가로 오해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6개월 뒤 후배의 도움으로 얻은 3천만원을 고스란히 날리는 일을 당한다. 그 때문에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와 사업을 하기 위해 오피스텔을 얻게 된다. 그 때 월드컵 4강이 내 기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만큼 충만한 신앙이 있었다. 나는 아들을 자퇴시켰다. 한학기만 마치면 졸업하니 제발 6개월뒤에 데려가라는 처형과 동서의 부탁도 무시하고 자퇴를 시킨 것이다. 아들은 아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것은 자만이었다. 나는 또 한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여자는 히로뽕 사용자였고 일본인에게 여자를 붙여주는 일을 했다. 나와 누나 그리고 그녀는 함께 불법적인 사업을 했다. 나는 바지사장이었다.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또 시작한 것이다. 그 여자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렸고, 남편과는 이혼을 하지 않고 별거 중인 상태였다. 결과는 너무도 비참했다. 아들은 나를 영영 버리고 떠났다. 내가 그 여자를 자신과 견줘서 선택했다고 여기면서. 나는 아무 것도 어쩌지 못했다. 완전한 패배를 본 것이다. 결국 다시 국립정신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서울정신병원은 규약이 까다로워서 그 이듬해 개인병원으로 옳겨서 치료를 받았다. 그 이후론 알코올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계신 시골로 내려가서 살면서 대마초를 다시 피기 시작했다. 또 다시 중곡동의 개인병원에 입원했다. 대마초를 피지 않은지 3개월만에 다시 나를 가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회복과 관련한 공부를 했다. 지금도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NA모임을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회복하면서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지난 일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내겐 큰 고통이지만, 그 고통으로 내가 성숙되어지는 것이기에 부족하나마 내 이력을 써보았다. 74년도에 첫 약물을 시작해서 2005년에 이르러서야 어느정도 약물에 벗어났기에 내 삶은 온통 약물로 도배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친구들도 나를 받아준다. 내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준다. 나는 NA프로그램을 작동시킨다. 작년 이맘쯤 회복을 위해서는 더 단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나는 스스로를 가두었다. 세상에 수많은 미련을 남겨둔 채,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으며, 지금도 내가 갖는 고통의 짐을 덜기 위해 또 나의 신을 찾는다. 그리고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아! 그대가 미덕 속으로 나아감으로써 얼마나 자신의 안식을 얻을 수 있고, 또 남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안다면, 그대는 거기에 더욱 마음을 기울여 노력하리라는 것을 나는 감히 단언한다]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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